자유게시판 | [천영훈 소장] 인터넷 게임이 마약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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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19-06-03 10:36 조회 : 8,37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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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멕시코의 유명한 마약왕인 차포 구즈만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었다. 국내에서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해외에서는 빈 라덴의 사살에 버금할 만한 큰 이슈로 다루어졌을 만큼 악명 높은 인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그의 고향인 시날로아 주(州)에서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차포 구즈만은 시날로아 주에서는 지역사회를 먹여 살리는 영웅과 같은 존재이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술집에서 버젓이 불려지며 많은 젊은이들이 조직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별다른 산업 기반이 없는 가난한 지역사회에서 대마초나 아편 제배를 통한 마약 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며 구즈만은 이를 통해 얻은 막대한 부를 통해 지역사회에 돈을 뿌리며 사람들을 포섭해 왔다. 멕시코에서는 2007년 마약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래 공식적으로 8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으며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납치, 강간, 폭력으로 시달렸다.
마약 중독의 문제는 전적으로 돈의 문제이고 탐욕의 문제이다.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중독자라도 더 양산해야만 하는 것이 이 사업의 핵심이다. 중독자는 평생 고객이며 변심하지 않는 충성 고객이기도 하다. 어느 상품의 충성 고객이 그 상품을 얻기 위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노력하는 고객이 있던가? 마약을 팔아야 하는 이들은 자신이 파는 상품의 위험성을 지우거나 축소하는데 필사적이다.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이 약하다고 떠들며 필로폰은 피로회복제란 이름으로 건네진다. 소위 ‘중독’으로 인한 끔찍한 결과들은 중독에 취약한 소인을 지닌 개인의 문제로 돌리며 개인의 ‘책임 있는 사용’을 강변한다. 하물며 먹는 것도 아닌 샴프병 하나에도 깨알 같은 주의사항과 경고 문구가 적혀있다. 샴프로 인해 엄청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일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간경화를 유발하는 소주에는 단 3줄의 경고문이 적혀있을 뿐이다.
2년 전 알코올, 도박, 마약과 함께 게임의 문제를 중독의 차원에서 접근해 나가자고 발의되었던 소위 4대 중독관리법안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게임업계가 내세운 논리는 ‘게임이 마약이란 말이냐’였다. 물론 게임은 마약일 수 없다. 이 법안을 지지했던 중독 전문가들이 그렇게 주장한 바도 없다. 주류업계가 4대 중독관리법안을 향해 ‘맥주가 마약이냐’라고 볼 멘 소리를 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단지 임상 현장에서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 관리가 필요한 대표적인 중독 위험성이 있는 분야에 게임 또한 포함 되었을 뿐이다. 게임이 마약이냐는 식의 논리는 이미 그 폐해가 드러난 게임 중독에 대한 대책 마련이라는 핵심을 비껴가 단순히 게임이 마약이다, 아니다의 논쟁 속으로 매몰시키려는 물타기일 뿐이다.
하지만 ‘게임이 마약이냐’라는 도전적인 물음에 대하여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해 온 의사로서 ‘마약일 수 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더 솔직하게는 ‘마약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니 ‘마약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은 단순하게는, 돈을 걸고 이득을 취하는 도박이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과 컴퓨터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형태의 성취감을 추구하는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현실에서의 소외와 박탈은 가상세계에서의 성취로 보상받는다. 게임을 통한 자존감과 자기 효율감의 증진을 이야기 하지만 만랩을 찍은들 현실 세계의 내가 성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식의 논리는 마치 반복 재발한 조증(mania)이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중독 행위의 지속에 있어서 도박이 현금 동원이라는 현실적 경제적 한계를 지닌데 비해 게임은 근본적으로 ‘시간’을 투자한다는 측면에 있어서 살아있는 한 무한 배팅이 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자연 속에서 부딪치고 사람들 속에서 성장해가야 할 아이들의 소중한 ‘시간’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컴퓨터 스크린 속 세상에, 전원을 끄는 순간 사라지는 가상의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스마트 폰을 통한 사행성 게임과 불법 스포츠 도박은 이미 인터넷을 통한 ‘게임’과 ‘도박’의 경계마저도 지워버리고 있다.
인터넷게임 산업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오랜 시간 게임에 접속해 있도록 해야지만 이윤을 얻는 구조이다. 사람들을 보다 오랫동안 스크린 속에 붙잡아 두기 위한 현란한 그래픽과 사운드, 드라마적 요소 등 모든 수단이 총 동원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써의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는 없다. 게임 개발의 목적은 분명하다. 바로 ‘돈’이다. 물론 한 개인이, 그 개인을 둘러싼 가정과 사회가 게임 중독으로 망하길 원하며 게임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한 광범위한 폐해가 지속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인터넷 게임 중독을 단순히 중독성 성향을 가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안전하고도 책임 있는 사용을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서구 사회에서 ‘담배보다’ 중독성이 적다는 논리에 밀려 대마초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마약 중독자들에게 ‘안전한’ 주사기를 나눠줘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도박 중독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도박장의 건립은 지역 사회 내 수많은 도박 중독자를 양산해 낼 뿐 ‘건강한 여가 생활’로서의 도박은 허구일 뿐이다. 중독에 있어서 ‘접근성’의 문제는 그것이 가격적 측면이든 지리적 측면이든 중독을 만연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유비쿼터스가 구현된 사회에서의 게임은 이미 지리적 접근성이라는 장벽을 무너뜨렸으며 가격적 요인에 있어서도 게임만큼의 경쟁력을 가진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레벨을 올리는데 가장 필요한 자원은 돈이 아닌 ‘시간’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무료이며 당신이 일정부분 돈을 더 낸다면 남보다 더 빠른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유혹하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게임 산업은 어찌 보면 마약 산업보다도 더욱 광범위하고 강력한 중독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만 문화와 기술이라는 보다 정교하고 세련된 가치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마약이든, 도박이든, 그것이 술이나 담배 혹은 게임이든 나름의 중독성을 지낸 물질이나 행위를 적극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중독성을 지닌 영역이 지닌 폐해를 예방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발은 공급자에 대한 규제이다. 마약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집단이 건재하는 한 마약중독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중독성의 강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할지 모를 게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미 게임회사들은 인터넷 광고를 통해 ‘강한 중독성’을 카피로 내세우고 있다. 강한 중독성을 장점으로 홍보하여 잠재적 사용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뒤돌아서서는 왜 게임이 강한 중독성을 지닌 마약과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나며 항변하고 있다. 이쯤 되면 심각한 자기모순이다. 게임 사용자의 광범위하고도 무차별적인 증가는 필연적으로 게임 중독자의 대량 양산을 초래한다.
멕시코의 마약왕 차포 구즈만이 사실상 한 지역의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 현실일지 모른다. 4대 중독관리 법안을 반대했던 게임 업계가 10조 규모의 산업을 위축시킨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롤(LOL: League of Legends)이 중,고등학교의 교실들을 초토화시켜가고 있는 동안 벌어들인 돈이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갔는지는 의문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느 틈엔가 우리 모두의 구호가 되었고 모든 규제와 감시를 무력화시키는 절대 반지가 된지 오래다. 신문지상을 통해서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거두었다는 기사를 통해서 뿌듯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들의 삶은 여전히 곤궁할 뿐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경제 살리기인지를 들여다보고 감시해야 하며, ‘우리 모두’를 위한 살리기가 되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이들을 최소화함으로써 건강한 중산층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건강한 유저가 많아져야만 게임이 문화 컨텐츠로써 자리 매김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 업계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인터넷 게임 중독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수준에서의 규제와 치료 재활을 위한 시스템 마련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인터넷 게임이 마약이냐’는 선정적인 아젠다와 감정적 반대는 ‘게임이 마약과 다를 게 뭐냐’는 또 다른 반대를 유발할 뿐이다. 단언컨대, 게임으로 병든 이들이 우리 사회에 넘쳐날수록 결국 마약과 동급으로 취급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작용을 예방하고 중독자들을 조기에 발견, 치료해 나가는 일은 게임 업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 책임과 소요 비용을 전적으로 게임업계에 떠넘기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고 모든 문제를 생산자와 소비자의 문제로 떠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국가는 게임 산업을 건강하게 육성하고 폐해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힘써야 할 의무가 있다. 게임은 분명 마약이 아닌 소중한 문화 컨텐츠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로 포장된 어른들의 ‘돈 벌이’에 수백 명의 소중한 아이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우리 모두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공범이었으며 방조자였다. 우리는 항해 중인 또 다른 세월호를 지켜보고 있다. 엄청난 수의 청소년들이 타고 있는 배 위에 여러 가지 화물들이 실려 있다. 갑판 위에는 마약과 같은 화물이 감히 올라설 수 없도록 해야만 한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화물은 실려야 할 화물이며 실을 수밖에 없는 화물이기도 하다. 과도한 선적이 침몰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 침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평형수’이다. 화물 과적에 대한 제한이전에 시급한 것은 말라버린 평형수를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시급하게 인터넷 게임 중독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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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중독의 문제는 전적으로 돈의 문제이고 탐욕의 문제이다.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중독자라도 더 양산해야만 하는 것이 이 사업의 핵심이다. 중독자는 평생 고객이며 변심하지 않는 충성 고객이기도 하다. 어느 상품의 충성 고객이 그 상품을 얻기 위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노력하는 고객이 있던가? 마약을 팔아야 하는 이들은 자신이 파는 상품의 위험성을 지우거나 축소하는데 필사적이다.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이 약하다고 떠들며 필로폰은 피로회복제란 이름으로 건네진다. 소위 ‘중독’으로 인한 끔찍한 결과들은 중독에 취약한 소인을 지닌 개인의 문제로 돌리며 개인의 ‘책임 있는 사용’을 강변한다. 하물며 먹는 것도 아닌 샴프병 하나에도 깨알 같은 주의사항과 경고 문구가 적혀있다. 샴프로 인해 엄청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일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간경화를 유발하는 소주에는 단 3줄의 경고문이 적혀있을 뿐이다.
2년 전 알코올, 도박, 마약과 함께 게임의 문제를 중독의 차원에서 접근해 나가자고 발의되었던 소위 4대 중독관리법안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게임업계가 내세운 논리는 ‘게임이 마약이란 말이냐’였다. 물론 게임은 마약일 수 없다. 이 법안을 지지했던 중독 전문가들이 그렇게 주장한 바도 없다. 주류업계가 4대 중독관리법안을 향해 ‘맥주가 마약이냐’라고 볼 멘 소리를 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단지 임상 현장에서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 관리가 필요한 대표적인 중독 위험성이 있는 분야에 게임 또한 포함 되었을 뿐이다. 게임이 마약이냐는 식의 논리는 이미 그 폐해가 드러난 게임 중독에 대한 대책 마련이라는 핵심을 비껴가 단순히 게임이 마약이다, 아니다의 논쟁 속으로 매몰시키려는 물타기일 뿐이다.
하지만 ‘게임이 마약이냐’라는 도전적인 물음에 대하여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해 온 의사로서 ‘마약일 수 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더 솔직하게는 ‘마약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니 ‘마약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은 단순하게는, 돈을 걸고 이득을 취하는 도박이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과 컴퓨터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형태의 성취감을 추구하는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현실에서의 소외와 박탈은 가상세계에서의 성취로 보상받는다. 게임을 통한 자존감과 자기 효율감의 증진을 이야기 하지만 만랩을 찍은들 현실 세계의 내가 성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식의 논리는 마치 반복 재발한 조증(mania)이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중독 행위의 지속에 있어서 도박이 현금 동원이라는 현실적 경제적 한계를 지닌데 비해 게임은 근본적으로 ‘시간’을 투자한다는 측면에 있어서 살아있는 한 무한 배팅이 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자연 속에서 부딪치고 사람들 속에서 성장해가야 할 아이들의 소중한 ‘시간’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컴퓨터 스크린 속 세상에, 전원을 끄는 순간 사라지는 가상의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스마트 폰을 통한 사행성 게임과 불법 스포츠 도박은 이미 인터넷을 통한 ‘게임’과 ‘도박’의 경계마저도 지워버리고 있다.
인터넷게임 산업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오랜 시간 게임에 접속해 있도록 해야지만 이윤을 얻는 구조이다. 사람들을 보다 오랫동안 스크린 속에 붙잡아 두기 위한 현란한 그래픽과 사운드, 드라마적 요소 등 모든 수단이 총 동원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써의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는 없다. 게임 개발의 목적은 분명하다. 바로 ‘돈’이다. 물론 한 개인이, 그 개인을 둘러싼 가정과 사회가 게임 중독으로 망하길 원하며 게임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한 광범위한 폐해가 지속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인터넷 게임 중독을 단순히 중독성 성향을 가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안전하고도 책임 있는 사용을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서구 사회에서 ‘담배보다’ 중독성이 적다는 논리에 밀려 대마초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마약 중독자들에게 ‘안전한’ 주사기를 나눠줘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도박 중독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도박장의 건립은 지역 사회 내 수많은 도박 중독자를 양산해 낼 뿐 ‘건강한 여가 생활’로서의 도박은 허구일 뿐이다. 중독에 있어서 ‘접근성’의 문제는 그것이 가격적 측면이든 지리적 측면이든 중독을 만연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유비쿼터스가 구현된 사회에서의 게임은 이미 지리적 접근성이라는 장벽을 무너뜨렸으며 가격적 요인에 있어서도 게임만큼의 경쟁력을 가진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레벨을 올리는데 가장 필요한 자원은 돈이 아닌 ‘시간’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무료이며 당신이 일정부분 돈을 더 낸다면 남보다 더 빠른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유혹하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게임 산업은 어찌 보면 마약 산업보다도 더욱 광범위하고 강력한 중독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만 문화와 기술이라는 보다 정교하고 세련된 가치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마약이든, 도박이든, 그것이 술이나 담배 혹은 게임이든 나름의 중독성을 지낸 물질이나 행위를 적극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중독성을 지닌 영역이 지닌 폐해를 예방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발은 공급자에 대한 규제이다. 마약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집단이 건재하는 한 마약중독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중독성의 강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할지 모를 게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미 게임회사들은 인터넷 광고를 통해 ‘강한 중독성’을 카피로 내세우고 있다. 강한 중독성을 장점으로 홍보하여 잠재적 사용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뒤돌아서서는 왜 게임이 강한 중독성을 지닌 마약과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나며 항변하고 있다. 이쯤 되면 심각한 자기모순이다. 게임 사용자의 광범위하고도 무차별적인 증가는 필연적으로 게임 중독자의 대량 양산을 초래한다.
멕시코의 마약왕 차포 구즈만이 사실상 한 지역의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 현실일지 모른다. 4대 중독관리 법안을 반대했던 게임 업계가 10조 규모의 산업을 위축시킨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롤(LOL: League of Legends)이 중,고등학교의 교실들을 초토화시켜가고 있는 동안 벌어들인 돈이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갔는지는 의문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느 틈엔가 우리 모두의 구호가 되었고 모든 규제와 감시를 무력화시키는 절대 반지가 된지 오래다. 신문지상을 통해서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거두었다는 기사를 통해서 뿌듯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들의 삶은 여전히 곤궁할 뿐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경제 살리기인지를 들여다보고 감시해야 하며, ‘우리 모두’를 위한 살리기가 되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이들을 최소화함으로써 건강한 중산층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건강한 유저가 많아져야만 게임이 문화 컨텐츠로써 자리 매김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 업계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인터넷 게임 중독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수준에서의 규제와 치료 재활을 위한 시스템 마련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인터넷 게임이 마약이냐’는 선정적인 아젠다와 감정적 반대는 ‘게임이 마약과 다를 게 뭐냐’는 또 다른 반대를 유발할 뿐이다. 단언컨대, 게임으로 병든 이들이 우리 사회에 넘쳐날수록 결국 마약과 동급으로 취급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작용을 예방하고 중독자들을 조기에 발견, 치료해 나가는 일은 게임 업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 책임과 소요 비용을 전적으로 게임업계에 떠넘기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고 모든 문제를 생산자와 소비자의 문제로 떠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국가는 게임 산업을 건강하게 육성하고 폐해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힘써야 할 의무가 있다. 게임은 분명 마약이 아닌 소중한 문화 컨텐츠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로 포장된 어른들의 ‘돈 벌이’에 수백 명의 소중한 아이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우리 모두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공범이었으며 방조자였다. 우리는 항해 중인 또 다른 세월호를 지켜보고 있다. 엄청난 수의 청소년들이 타고 있는 배 위에 여러 가지 화물들이 실려 있다. 갑판 위에는 마약과 같은 화물이 감히 올라설 수 없도록 해야만 한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화물은 실려야 할 화물이며 실을 수밖에 없는 화물이기도 하다. 과도한 선적이 침몰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 침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평형수’이다. 화물 과적에 대한 제한이전에 시급한 것은 말라버린 평형수를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시급하게 인터넷 게임 중독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9-08-06 16:53:14 칼럼에서 복사 됨]